독백 - 청년작가 백월의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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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기자 작성일 22-03-25 13:18 조회 8,508본문
눈앞이 캄캄하다. 아니 눈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나의 손을, 나의 몸을 찾아보고 싶어도 보이지도 잡히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완전한 무. 몸을 포함한 감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독백을 읊을 뿐. 생각을 읊고, 읊는 것이 글이 된다. 아는 것은 그것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백월야. 멍하니 뭐해?”
목소리가 들려오자 귀를 인식했다. 소리를 인식했다. 소리를 인식하는 뇌를 인식한다. 나의 형체를 만들어간다.
“야?”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깜박인다. 눈앞의 사람을 본다. 보고 있는 눈을 인식한다. 바람이 부는 듯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온다. 눈앞 사람의 뒤로 차례로 즐비한 나무들이 보인다. 가로수인 듯하다. 가로수 들이 놓여 있는 도로가 보인다.
“...?”
눈앞의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째서인지 이 사람을 알고 있다.
“이초하. 그 손 내려 멀쩡하니까.”
따귀를 때릴듯하던 손이 밑으로 내려간다.
말을 했다. 말을 한 입을 인식한다.
순간 거센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봄의 향기를 가져다주었다. 봄의 꽃 냄새를 바람을 통해 맡는다. 냄새를 맡는 코를 인식한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나의 몸 구석구석의 감각으로 나의 몸 전체를 인식한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올려 바람을 막았다. 새하얀 나의 손과 팔이 보이고 시야의 위쪽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보인다. 나의 생김새를 대충 어림잡고 머릿속에 기억한다.
“그래서 뭐하고 싶은데.”
저절로 입이 열렸다. 그리고 지금 이전의 기억들이 번개처럼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네 생일이니까 빨리 정해. 안 그럼 그냥 집 갈 거야.”
발을땐다. 한 걸음 내딛고, 이 행위를 반복해 걷는다. 집으로 가려고 하자 초하가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애초에 우리 둘 만이서 어쩌려고. 그리고 다른 애들하고도 이미 같이 신나게 놀았으면서 뭘 더 놀려고 하는 거야.”
나의 말에 초하는 입을 삐쭉 내놓고 볼을 부풀렸다. 초하의 볼을 잡아 바람을 빼며 몇 번 흔들고 던지듯 놓고는 다시 걸었다. 그렇게 하니 초하는 볼을 쓰다듬으며 자기가 삐졌다는 것을 과시하며 나의 뒤를 따랐다.
“그래도 모처럼 생일인데 더 놀고 싶단 말야.”
뒤에서 궁시렁대며 따라오는 초하를 무시하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끝내 초하는 나의 가방을 잡고는 때를 썼다. 나의 몸이 뒤로 기우는가 싶더니 초하의 말이 들려왔고.
“그럼 카페라도 가서 뭐라도 먹자아!”
앞으로 가다 순간적으로 가방을 잡히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무력하게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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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허니브레드와 파르페를 행복한 얼굴로 먹고 있는 초하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맛있냐. 내 돈이.”
초하는 그대로 웃으며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이내 한숨을 쉬며 앞에 놓여 있는 초코라떼를 홀짝였다. 그러고는 문득 드는 생각에 잠긴다.
독백을 읊는다.
기억이 돌아왔다. 아니 덮여 씌어졌다. 나는 분명 백월야이지만 기억이 덮여 씌이기 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그 기억 또한 같이 가지고 있다. 때문에 지금 나는 나의 존재에 혼동을 느끼고 있다. 나는 과연 백월야 일까.
“넌 다른 건 안 먹고 그것만 먹으려고?”
초하의 말이 나의 상념을 일깨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안 그래도 돈 없는데 네가 하도 졸라서 온 거니깐 나한테 감사하라고.”
나의 말에 초하는 “감사.”라고 말하고는 다시 파르페를 열심히 먹었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다시 상념의 바닷속으로 잠수했다. ‘나는 과연 백월야 일까.’부터 다시. 지금 나는 상념 속에서 독백을 읊는다. 그리고 그 독백은 글자가 되어 나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정리된다. 마치 소설처럼.
소설?
소설.
소설...
소설인가? 이 세계는. 어떤 소설일까. 유명한 소설일까. 아니면 무명 소설일까. 그것도 아니면 나오지도 않은, 완성되지도 않은 소설일까. 그런 건 지금 당장은 상관없다. 지금 이 세계가 소설이라고 가정한다면 나는 어떻게 이곳에 들어와 있을까. 그리고 왜, 그 이전 세계의 기억은 없을까.
왜.
무엇이 나를 이 세계에 던져 놓은 걸까. 무엇이 나를 이 세계에 부른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나를 이 세계에 창조한 걸까.
무엇이.
“야!”
초하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초하의 앞은 어느새 빈 그릇과 빈 컵만이 남아 있었고 나의 앞에 있던 초코라떼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길래 불러도 몰라?”
“아, 아무것도. 다 먹었으면 가자.”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내가 지나온 길만이 형태를 잡고 색을 통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고, 나머지 풍경은 형태도 없이 새까만 안개에 물들어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기에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도 소리와 냄새로 인해 조금씩이나마 형태를 잡고 있는 검은 안갯속의 세상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진정되었다. 그리고 저 모든 안개들이 없어지게 된다면 이 세계가 현실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접어둔 체 나는 다시 이 세계의 백월야로 돌아가 초하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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